남해문화원 사업
[ 1989 ] 정대장익환공전기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1.02
조회수196
◈ 정대장익환공전기 ◈
1848 - 1919
정대장은 백년전 사람이지만 아직도 창선 사람들은 우상처럼 섬기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 도탄에 빠져있던 섬사람들을 위해 가산을 탕진하고 평생을 의를 위해 희생한 공의 거룩한 전기를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 부터이나 공의 후손들께서 전기를 준비중이라고 듣고 있어 감히 필자따위가 손댈 일이 아니라고 주저했다.
그러나 이 전기는 한사람의 전기로서가 아니고 망실되어가는 창선의 역사를 재조명시키는 중요한 뜻을 갖고 있다.
가령 수세기에 걸쳐 도민에게 군림하였던 제조부라는 그 기구가 사실을 고중할만한 것이 채 백년도 못되는 동안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으니...
하기야 구한말의 추찹스런 치부를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할 법도 했고 아니면 합병이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지엽적인 말단구조 따위는 사료가치가 없다고보아 도외시 했는지?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에게는 분명 중요한 역사이다. 사실은 사실로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이전기를 쓰기로 했다. 훗날 더욱 정확한 전기가 나올 것을 바라옵고 그 밑글에 보탬이 된다면 영광이겠다.
공이 호는 여계 이름은 익환 나주 정씨 덕성공 사십세손으로 무신, 1848, 조선헌종 14년) 5월 11일 정진교의 삼남으로 태어나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식포부락에 살고 있었다. (당시는 진주목 남면 대리였음)
천성이 강직하고 남달리 담이크고 통솔력이 뛰어나서 가히 혁명아적 큰 그릇이라 했다.
일찌기 무과에 합격하여 소시적 사천군 선률진에 파견대장격으로 근무한 고로 그로부터 "정대장(대자는 대리근무일 경우 즉 대장의 보결 또는 대신 출전하는 장수등에 붙이는 호칭)이라 불렀다 한다."
모내기철인 어느날 목관(창선의 행정 책임자)과 같이 길을 가다가 "쓰레질"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옛날 쓰레질할때 소를 두세마리씩 넣어서 함께 쓰레질을 하였는데 흙탕물에 모두 눈코가 분별이 않되는 진흙투성이가 된다)
"저런것도 계집이 있느냐?"
흙탕물을 둘러쓰고 소를 부리는 모습이 사람같지 않고 목관이 보기에는 천민치고 막바지 천민같아서 그렇게 물었으리라.
화를 버럭낸 공이 목관을 논구렁에 떨쳐 밀었다.
방금 쓰레질한 흙탕물을 둘러쓰고 기어 나오는 목관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당신의 꼴이나 저사람들 꼴이나 다를께 뭐냐"고 꾸짖어 나무랬다.
목관이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했다 한다.
아직도 농부들이 들일하다가 험한 모습을 서로 쳐다보며 곧잘 인용하는 공의 일화이다.
공의 행적을 소개하자면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설명하는것이 순서일까 한다.
이태조는 무과출신인지라 군마양육의 필요함을 느끼고 해안도서 요처에 양마계획으로 창선에 목장을 설치하여 진주에 예속시켰다.
목장에는 지목명칭이 두가지가 있는데 야지에서 논밭을 일구어 농사짓는 것을 민유지로 "개경"이라 하여 "두초대"라는 명목으로 조세를 징수하였고 산간벽지를 목민들에게 양마나 잘하고 먹고살도록 관유지를 면세지로 한 것을 절수라 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 매관매직을 일삼던 때이라 중국의 한고조 시대의 국가유공자의 식읍제도(국가에서 특히 공신에게 내리어 거두어 드리는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한 제도)를 모방하여 해안도서 12개 목장을 삼정승의 식읍화하여 제조부(국가기관이 아님)라는 것을 설치하고 이가 도서지방을 관장케 하고 목민들에게 두초대라는 이름의 조세를 징수하여 국고에 관계없이 그들의 사목을 채웠다.
따라서 목관의 임면도 제조부가 전담하였고 직제는 군수제도에 준하여 이, 호, 예, 병, 형, 공, 육뷰관속을 두었다.
창선의 조세는 매년 백미 1,000석으로 이를 거두어 서울 제조부로 운송했는데 이 배를 조운선이라 했고 당저2리 해안의 창고에서 운송하였기에 해창이란 동명이 붙었다.
그러하던것이 갑오(1894) 동학란과 더불어 제조부가 풍지박산 되고 목장도 폐하였다는데 그때는 통신시설의 미비와 행정질서가 없는 때이라 그런줄도 모르고 여전히 갑오년도의 1,000석을 싣고 호방 김화선이 상경하였더니 제조부가 폐지된지라 물욕이 동한 김호방은 조운선을 되돌려 마산, 통영 등지에서 백미 1,000석과 잠적하였고(이상은 창선면 제6대 면장의 수기에 의함) 목장은 폐하여 개경 절수 구분없이 저절로 민유화되어 매년 거두어 들인 조세도 면하게 되었는데 4년뒤인 무술년(1878)에 부임한 모간리가 이를 발견 고자질하여 4년간의 두초대를 도세(오늘날의 과태료의 성격)라는 이름으로 관유민유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징수하려 하여 전도가 요란했다.
평소 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공은 섬사람들의 사활이 걸려있는 이 처사에 분격하여 김이후화등 동지를 규합 논의하여 선박의 왕래를 끊어 관리들의 내왕을 막고 전도민이 총궐기 하였다.
공은 거사를 앞두고 먼저 가족에게 순종여부를 따졌다.
먼저 아들에게 소를 지붕위에 몰아 올리게 명령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서 아들이 어려움을 나타내자
"애비의 분부를 거역할소냐"고 다짐하여 아들이 볏짚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소를 지붕의로 몰아올렸다.
또 공은 며느리에게 뜰에 나와서 춤을 추게 하였다.
맨숭맨숭한 마음으로 시아버님 앞에서 혼자 춤을 춘다는 것은 여염집 부녀자로서 쉬운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아버님 호령에 지붕위로 소를 몰아올리는 남편을 보고 어쩔수 없이 춤을 추었다.
이를 보고 공은 크게 만족하여 쾌한 마음으로 결심을 하고 전답을 팔아 거사자급을 마련하고 항쟁에 앞장섰다.
후세에 이를 가르켜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하는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확인한 것이라 했다.
그만큼 공은 사려가 깊고 대의를 위해 물심을 아끼지 않는 분이었다.
공은 산중에 터를 잡아 초막을 지어 기거하였고 장정들은 자진하여 번갈아 불침번을 맡아 공을 호위하였다.
도민듸 난을 진압코자 관헌이 공을 체포하려 하여도 전도의 장정들이 수백명씩 자진동원되어 초막을 둘러싸고 접근을 못하도록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였다.
장정들은 제각기 한발의 "새끼줄 고리를" 만들어 옆구리에 차고 다니다가 공을 체포하려하면 공을 중심으로 인의 장막을 치되 앞사람의 새끼고리에 뒷사람이 연달아 걸어서 각자의 새끼줄고리 위치를 고수하여 몇바퀴고 둘러싸서 구호를 외치고 기세를 올렸는데 이 인의장막에 관헌들도 어쩔수 없었다 한다.
이 항쟁은 7년이나 계속 됐다는데 말이 쉬워 7년이지 어느 세계사에 7년간의 민중봉기의 기록이 있는가? 도저히 믿어지지 아니할만큼 전도민이 한덩어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당시 정국은 동학란에 이어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군마가 삼천리 강토를 짓밟고 민비가 시해되는 등 1896년 고종32년 강원도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도체에서 의병사건이 일어나는 때이라 척진도세로 시작된 민중봉기는해를 거듭할수록 망국한의 울분으로 변하여 기세가 더욱 불타 올랐다.
좀처럼 인의장막을 뚫고 공을 체포하기가 어려워지고 차츰 그 색체가 항일운동으로 기울자 병오년(1906) 음력 8월1일 가증스런 일본군이 투입되어 무자비한 총격으로 공을 측근에서 보좌하던 장봉석씨 김○○씨, 김○○씨등 세사람이 사망하고 공은 체포된 뒤 진주감영에 수감되어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도민들은 도세도 면하고 경지도 민유화 되었는데 공의 법정기록이 보존되지 못함이 유감스럽다.
일설에 의하면 연안각도서의 관유지가 이 사건을 계기로 다 함께 민유화 되었다는데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있을 법한 일이나 정확한 사료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의 시말이 구한말에서 합병초기이고 병오년(1906) 9월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남해군으로 이속되는 등 행정의 과도기적 시기이고 보니 어느 곳에도 관계되는 기록을 찾을 길이 없고 다만 진주지에 단편적이나마 보여지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창선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계셨던 임충규선생님(1884~1973)께서는 기회 있을때마다 학생들에게 공의 일화를 자주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소년시절에 서울에 진학차(휘문고보) 구술시험(면접시험)때
"고향이 어디냐?"
"영남 진주이올시다."
"그러면 정익환공을 아느냐?"
깜짝 놀라왔고 반가왔다.
"네 고향의 선배 어른으로 이러이러한 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셨다.
그만큼 학계에 까지 널리 알려졌던 분인데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갔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공이 진주감영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전도의 50대 이상의 중년부인네들이 매일 10여명씩 감영의 뜰에 연좌하고 공의 무죄방면을 호소했는데 누구가시키는 것도 아니고 부인네들이 동리끼리 의논하여 순번대로 교대하여 비가오나 눈이오나 몇 해를 계속하였다. 이를 당시는 "등장간다" 하였고 진주까지 수륙백리길을 부녀자들이 앞소리 주고 받아 도보로 오르내렸는데 그 앞소리가 "등장가세 등장가세 나랏님께 등장가세" 했고 이에 참가하는 부녀자들은 용모단정하고 품위있는 분들끼리 서로 골라서 여비도 각자가 마련하였고 참가하는 긍지와 열성은 대단했다 한다.
이러한 정황이 상주되어 전술한 면세의 특전과 공의 특사가 이루어졌다 하니 오늘날의 유행하는 연좌데모나 시위운동이 백년전에 이러한 민중운동이 있었다 함은 놀라운 일이고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세항쟁은 섬사람들의 생계에 위협을 미치는 직접적인 원인과 섬사람들이 갖는 독특한 자위적인 단결심이 작용한데다가 시대적 사조도 거들었던 공의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탁월한 영도력의 결정이라 하겠다.
공은 출옥후 여생을 향리에서 조용히 보내다가 을미녀(1919)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무렵인 2월 11일 향년 86세로 천수를 다했는데 공과 더불어 항쟁의 선봉에서 쓰러진 고 장봉석씨와 두 김씨의 넋을 달랠 기회가 없었음은 유감스러우며 지난날 상신 고개마루에 정대장송덕불망비를 건립함에 있어서도 일경의 압력으로 항일의 어구는 등재될 수도 없었고 존술한 사망제공들의 존함조차 영원히 말살토록 하여 점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져 왔음은 몹시 안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선열들의 거룩한 발자취와 개인의 사생활을 내동댕이 치고 10년 세월을 거도민적거사에 동참하였던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님들의 순박하고 착하디 착한 향토애를 거울삼아 내고장 발전에 더욱 힘쓸것을 우리 다 함께 다짐하면서 끝으로 구천에 계신 제공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 전기를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