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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 남해문화저널 제12집(지역N문화)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3.12

조회수163

첨부파일

◈ 남해문화저널 제12집 ◈

 

좋은 사람들과 만남의 행복

 

나는 섬에 갇혀 있다. 그러나 섬은 언제나 열려 있다. 죽방렴 임통에 들어간 멸치떼가 스스로 빠져 나오기를 거부하듯 나 역시 섬을 맴돌고 있다. 간혹, 열려있는 문틈으로 섬을 빠져나갔다가도 금새 회귀하고 만다. 그것은 섬 바깥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 섬에는 끊임없는 새로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닫혀 있으면서도 가장 크게 열려 있는 일점선도!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1997년 여름, 나를 섬으로 내몬 건 순전히 바람이었다. 범선 지하에 웅크리고있던 서생원처럼 곧 불어닥칠 아이엠에프를 직감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갈수록 팍팍해 지고 있는 세파를 벗어던지고자 했을는지는 더욱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섬으로 침잠했다. 나는 섬이 되었다. 나는 투명한 물빛 겨울바다가 되었다. 나는 오색 찬연한 가을산이 되었다. 그리고 여름날 벼 싹 푸른 다랭이 논이 되었다. 봄의 연분홍 철쭉이 되었다.

 

내가 섬에 갇혔을 때, 나를 열어 준 것은 '남해'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었다. 나는 남해에서 대지를 뚫고 새롭게 피어나는 역사를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에 아롱진 문화라는 꽃을 보았다. 내가 스스로 열어가야 할 일들... 그것은 만남과 소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해문화사랑회의 씨앗을 뿌린 것이 첫 시작이었다. 8명의 회원들은 남해를 부둥켜안고 구애의 몸짓을 나누었다. 그러기를 열두 해, 지금은 75명의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남해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남해를 보물섬으로 만들어 나갔다.

 

지금 나는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내 정신을 맑게 씻어줄 사람들과의 만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섬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들과의 만남이 존재했을까? 하지만 행복의 그늘 아래에는 항상 서러움이 따라 다닌다. 그것은 이별과 망각이라는 잔인한 단어 때문이다. 재회를 약속하며 손흔들어 보내야 했던 이들을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때 느끼는 비애는 시린 칼날보다 두렵다. 그리운 이들을 찾아 섬을 떠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면 더욱 서러움에 빠져 든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만남의 행복이 헤어짐의 서러움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고두현 시인과 함께 하는 세 번의 문학기행이 있었다. 그 중 잊혀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소설과 김주영, 박문호 회장, 안병기, 박필우, 임병기 형, 김영남 시인, 진희정 작가, 이해선, 김용선 누님... 하지만 고두현 시인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내년에는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둔 그리운 사람들을 꼭 만나야겠다.

 

올해 두 번의 문학기행 역시 소중한 사람들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지난 여름 첫 번째 문학기행은 평산항에서 사촌해수욕장을 걷는 바래길 제1코스 지겟길을 걸으면서 시작되었다. 8월 중순의 무더위도 우리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부산시인협회 김다희 편집장의 문학강연과 소주와 노래를 곁들인 밤의 향연은 모두를 '사랑'의 쇠사슬로 꽁꽁 묶었다. 노랫말처럼 사랑이 끝날 때까지...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끝나지 않으리라고 서로 확신했다.

 

두 번째 문학기행은 국내 유일의 시인 축구단 '글발'을 초청했다. 11월 13일과 14일, 이틀간이었지만 12일 밤에 미리 찾아든 첨병시인들로 인해 전야의 밤은 붉게 물들고 말았다. 빌어먹을 놈의 정은 새벽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단 말인가. 오렌지단란주점에서의 마지막 노래는 오렌지 빛 여명을 부르고 있었다. 글발 회원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중 서너 명은 분명 내 가슴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리라.

 

첫날 오후 사계절 푸른 잔디가 깔린 공설운동장에서는 축구경기가 열렸다. 삼동면 동산조기회와 3:3으로 비긴 글발팀은 아쉬움이웠지만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유배문학관 다목적홀에서는 시와 소리와 우리가 만났다. 이건청 한국시인협회 회장의 인사말, 하미자 남해문화사랑회장의 환영사, 이호균 남해문화원장의 격려사가 끝나자 본격적인 만남의 장이 시작되었다. 4편의 시가 낭송되고 박초연선생과 이금숙 선생의 부채산조가 멋들어지게 펼쳐졌다. 또 4편의 시가 낭송되고 조성환 선생의 피리공연, 김미숙 선생의 해금공연이 이어지자 우리 모두의 가슴은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3편의 시가 낭송되면서 모두는 하나가 되었다. 시와 소리의 향연을 끝내고 선소횟집에 모인 우리는 또다시 하나가 되었다. 내옆지기 조혜연의 대학 후배 박후기 시인의 멋들어진 사회로 진행된 뒷풀이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했다. 아, 이렇게 밤의 문화가 이루어지는구나. 이렇게 사랑이 시작되는구나. 첫 번째 가수로 지명된 나는 수 년만에 어쭙잖게 배웠던 <명태>를 소리쳤다. 노래가 끝나자 김요일 시인은 조금 더 잘 배운 <명태>를 잡았다. 그리고 유배문학관에서의 공연이 다시 리플레이 되고야 말았다.

 

"달아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귀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다리." 정읍사에서는 님가시는 길에 날이 저물까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날이 샐까 두려웠다. 우리는 달을 벗 삼아 이 한 밤 세워가며 이야기 하고 싶었다. 몸이 부실한 이들은 내일의 만남을 위해 떠났다. 마지막 남은 이들은 호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접혀진 배추이파리 하나씩 꺼내들고 시장 선술집을 향했다. 인심좋은 선술집 주모 누님은 난생 처음 겪는 젓가락 장단에 함께 흥겨워했다. 그렇게 우리는 벽을 허물어뜨렸다.

 

내가 남해에 머물며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고향 남해의 모든 것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한들 좋은 사람들과 만나는 행복이 없었다면 그줄을 끊고 도망쳤을는지도 모른다. 내 죽는 그날까지 그리운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이 다시 찾아줄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