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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 남해문화 제26호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6.03.09

조회수79

첨부파일

◈ 남해문화 제26호 ◈

 

 

 

정지석탑과 살아 숨쉬는 공존의 소망

 

 

남해군 고현면 탑동마을 길가에는 오랜 전부터 독특한 모양새를 한 돌탑이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탑을 '정지석탑(鄭地石塔)'이라 불렀다. 

석탑 주변에는 예전에는 고현면 전통시장이 있었는데, 인구가 줄면서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자 철거되었다. 이후 '대장정광장'이라 이름을 지은 공원 겸 쉼터가 들어섰다. 이 지역이 고려시대 증기 몽골의 침입 때 이를 극복하고자 전군민이 합심하여 팔만대장경을 판각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이었을 때나 광장으로 조성된 이후에나 정지석탑은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래 탑(塔, stupa)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다비(茶毘)를 통해 많은 사리(舍利)가 나왔는데, 이를 인도 곳곳 여덟 군데에 보냈고, 이 사리를 잘 보존하고 경배하고자 만든 데서 유래했다.

그 후 수백 년이 흘러 인도 불교를 중흥시킨 아쇼카 왕이 탑을 더 늘리고자 여덟 개 탑 중 하나만 원형을 보존하고, 나머지 탑에서 사리를 꺼내 분산하면서 탑이 대중화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나라로 들어오면 탑은 꼭 사리를 경배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찰의 장엄함을 꾸미기 위한 상징물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탑의 구성은 보통 맨 아래 기단(基壇)에서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의 탑신(塔神), 그리고 머리에 해당하는 상륜(相倫)이 그것이다. 탑신은 아래 몸돌과 위에 지붕돌을 얹어 이를 한 개 층(層)이라 부르는데, 탑은 홀수 증이 기본이라 삼층, 오층, 칠층으로 늘어난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고현면의 '정지석탑'은 상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먼저 기단이 애매하다. 기단은 으레 사각형 모양으로 돌을 둘러쳐 틀은 만든 뒤 흙을 담아 평지보다 조금 높게 조성되는데, 정지석탑의 기단은 인공적으로 조성되지 않고 큰 자연석 위에 버팀돌을 끼어 넣었다. 그러니 기단은 없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탑신 역시 5층이라고 볼 수는 있는데, 몸돌과 지불돌이 각각 다섯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모양과 형식이 일정하지 않고 비율도 줄기는 하지만 어정쩡해 한 날 한시에 조성된 탑이 아님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상륜을 장식한 돌도 엉성하기는 마찬가지다. 크기가 다른 돌 두개를 돌렸는데, 뭔가 어긋난 느낌이어서 아귀가 딱 맞아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탑의 전통 형식에는 맞지 않는 탑이 이곳에 서게 되었을가?

먼저 조성 연대부터 알아보자, 언제 이 탑은 여기 세워졌을까? 그 유래를 따지려면 이름에 들어가 있는 '정지'란 명칭부터 살펴야 한다.

 

정지(鄭地, 1347 ~ 1391)는 고려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장군이다.

젊어서부터 용맹을 떨쳐 주로 왜구(倭寇)를 소탕하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중 대표적인 업적이 1383년 5월에 있었던 관음포해전(觀音浦海戰)이다. 왜구들이 전선 120여 척을 모아 일전을 벌이려 모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장군은 급히 합포(合浦, 지금의 창원)로 가 수군을 정비했다.

그때 왜구들은 벌써 관음포(지금의 남해군 고현면 해안)까지 육박한 상태였다. 지체 없이 달려간 장군은 이 바다에서 격전을 벌여 적의 선봉 전투함 17척(또는 20여 척)을 완파하고, 적군도 수도 없이 섬멸했다.

이때의 큰 승리를 거둔 전투를 '환음포해전(또는 관음포대첩)이라 불렀는데, 이 석탑은 그때 승리의 주역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 이름은 당시 승리에 열광했던 주민들의 기쁨을 짐작하게는 하지만, 석탑의 건축 시기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석탑은 너무 투박하고, 또 격식에서 많이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추측에 따르면 이 석탑은 주변 산속에 세워졌던 사찰이 폐사(廢寺)되고 흩어져 있던 석탑의 일부분을 여기저기서 수습해 하나의 탑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 이 지역에서 왜구를 물리친 대승이 있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정지석탑'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남해의 어떤 향토학자(김봉윤 씨)는 이 탑을 일단 '탑동다층석탑'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찍은 정지석탑의 사진을 보면 장소도 지금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논 한 가운데 이 탑이 떡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위치인데 주변 지형이 바뀐 것일 수도 있기는 하다)

유래나 변천사가 어떻든 지금도 정지석탑은 제 자리를 지키면서 마을 주민과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어쩌면 그런 투박함이 더 이목을 끄는지도 모른다. 마치 이 땅에서 이름 없이 피었다 진 들꽃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닌 민초(民草)의 생명력을 대신 하듯이 말이다.

탑 앞에는 1948년 2월에 '탑동청년단'이라 이름한 마을 주민들이 세운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浮雲千載  뜬 구름 같은 천 년 세월 동안

野塔不騫  들판 탑은 이지러지지 않았네.

山川鍾氣  산과 내는 기운을 담았고

風雨補天  비와 바람은 하늘을 기웠네.

功造金佛  공덕으로 보면 금빛 부처님을 만들겠고

跡過洞仙  자취로 보면 골짜기 신선을 넘어섰네.

樹我墻我  우리를 기르시고 우리를 지켰으니

愛之護焉  사랑하면서 길이 보호하리라.

 

 

비록 긴 세월이 지난 뒤 쓰인 글이기는 하지만, 이 석탑이 왜구를 물리쳐 국토를 지켜주고 방패가 되어 목숨을 잇게 해준 소중한 존재임이 잘 드러나 있다.

탑이 서 있는 이곳 고현은 팔만대장정을 판각한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부침을 겪긴 했지만, 대장경과 함께 흩어진 돌들을 모아 탑으로 쌓아 올린 이곳 주민들의 갸륵하고 진실한 마음을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그렇게 탑과 사람은 같은 염원을 품에 안으며 오래 전부터 먼 미래까지 함께 동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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