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남서대로 2240번길 708
■ 망운사 망운사(망운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남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망운산의 정상 바로 아래, 해발 약 640m쯤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의 최고봉인 망운산 자락에 위치한 망운사입니다. 일주문이 독특하게 생겼는데, 알고보니 망운사가 아직 작은 암자일 때 있던 일주문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망운사는 역사가 800년이 넘어가는 사찰인데, 아쉽게도 왜구들의 노략질에 수차례 불에 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고승들의 피난처와 수행처가 되면서 역시나 화를 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망운사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남아있는 전각과 자료가 거의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가람 자체는 현대적인 느낌이었습니다. 그나마 망운사에 눈여겨 볼만한 것이 있다면, 망운사 입구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태국왕에게 받았다는 부처님 전신사리 5과를 모신 전신사리탑과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남해 망운암 건륭을사명 동종’, 보광전 불단 오른쪽에 모셔진 ‘남해 망운암 석조보살좌상’이 있습니다. 다만 망운사에는 주지스님이신 성각스님이 가장 유명합니다. 성각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이 부처님 제자가 되신 후에도 그림으로 수행을 하셨다고 하는..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망운로 10번길 45-10
■ 법흥사 법흥사는 1900년대 초에 지금 읍사무소 자리에 창건되었고, 그 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 옮겼다. 이 자리는 본래 남해향교가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향교를 조금 아래쪽으로 물려서 옮겨짓고 법흥사를 이건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읍사무소 자리에 창건되었을 때는 동헌에 있던 객사(客舍) 건물을 옮겨 법당으로 삼았고,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는 설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1807년(순조 7)에 해당하는 연호가 있는 막새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연대일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丙寅年 三月’이라고 적힌 기와도 있는데 아마도 병인년인 1926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1940년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말도 있다. 이 설법당은 2005년 10월에 해체되어 대웅전 왼쪽으로 이건되었다.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봉강산(鳳降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다.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로 153번길 240
■ 운대암 창선면 상신마을 도로에 있는 운대암이란 이정표를 따라 마을을 질러 산길을 내쳐 대방산 굽이굽이 고개를 돌아 산마루에 오르자 깊은 계곡 아래 저수지 물빛이 청명하다. 새소리를 길라잡이로 소나무숲 산빛을 깨치며 몇 구비를 더 돌면 운대암 범종루가 길을 막아선다. 아름드리 기목나무 옆 산기슭 부도에 머물던 눈길을 거두며 범종루를 지나자 층층 돌계단 위로 푸른빛 찬연한 청기와를 인 작지만 대방산 만큼이나 위용스런 무량수전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고려 초부터는 망경암이라 불리며 대방산 중턱에 창건되어 명당의 제일 기도도량으로 번창하여 오던 중, 조선시대에 운대암이라 개칭되었다. 상좌중이 낙상(落傷) 사망하여 한동안 절이 비었다가 임란 후에 세월선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20여 년 전 법정화상께서 오창(五倉)의 원력을 세우고 불심이 깊은 신도를 얻고자 기도에 정진하고 있던 중, 발심을 하여 오차 중창을 하게 되었다. 일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대작불사를 하였으며 법당(무량수전)과 산신각을 1990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오차 중창 때 요사채가 시멘 블록조여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광화상께서 우리 고유의 문화인 목조 기..
소재지 :경남 남해군 고현면 화방사길 128-6
■ 화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재위:681∼692년)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연죽사(煙竹寺)라 불렀고, 고려 중기 혜심(慧諶:1178∼1234)이 중창한 뒤에는 영장사(靈藏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위치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화방사라 하였다. 영조·정조 때 가직(嘉直)이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한 이후 용문사(龍門寺)·보리암(菩提庵)과 함께 남해군의 3대 사찰이 되었다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응진전·명부전·칠성각·일주문·채진루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채진루(採眞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본래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 1981년 10월 1일 불에 타 사라지자 1984년 12월 29일 복원하면서 전각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산내 암자로 망운암이 있다. 유물로는 옥종자(玉宗子)·금고(金鼓)·이충무공비문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 등이 유명하다. 이 중 옥종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실 때 밝혔던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꺼트려서도 안되고, 일단 꺼진 뒤에는 다시 불을 붙..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 상주면 보리암로 665
■ 보리암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하고 수도하시던 절로서 금산(錦山)의 한복판에 관음봉을 기대고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 바위의 장엄한 기운이 뭉쳐 의젓한 모습으로, 용을 타고 전후좌우 절을 하는 남순동자 바위와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을 거느리고 남쪽바다 용왕에 무슨 가르침을 내리는 듯하다. 보리암은 이런 바위들을 등지고 놓여 있다. 원래는 남해 보광산상 관세음보살 시현(示現)도량으로 그 옛날에 원효대사께서 이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부르고, 동록(東麓)에 범우(梵宇)를 지어 보광사라 불렀다. 그 뒤에 조선태조 이성계가 기도하여 왕위에 오른 일을 감안하여 이씨왕조의 원당으로 또한 호국기원도량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생긴 그대로 절이며, 바위머리마다 자연법당인 이곳은 그늘이 짙은 사부대중들의 기도 수도처라 할 수 있으니 뉘라서 이곳을 아니 그리워하랴.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어왔으니 고대의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며 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출가하여 남해 낙가산 금산(錦山)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불교 남방전래설(南方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