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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8. (토) ~ 09. (일)

남해섬 유배를 자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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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남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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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이동면 다정리, 남해읍 남변리·평현리·심천리를 비롯해 군내 각지의 해안평야와 창선도에까지 밀도 높게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섬이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690년(신문왕 10)에 신라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현(領縣)으로 설치했던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 혹은 西平)으로 모두 이때 개칭한 것이다.

1018년(현종 9)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영현인 난포·평산 양현은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다. 남해현도 1358년(공민왕 7)진주목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일명 鐥川 :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에 피란하였다. 창선도는 고려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라고 했다가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목의 영현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 흥선현(興宣縣)으로 개칭했으나 왜구 때문에 역시 살기는 힘들었다. 1269년(원종 10)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창선도에 수장했던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겼다. 고려 말 왜구의 침범이 날로 심해지자 1384년(우왕 10)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404년(태종 4) 왜구 때문에 진주 땅으로 피란한 지 46년 만에 남해현을 복구하였다. 이때 구라량(仇羅梁)01) 만호 임덕수(任德秀)가 현령을 겸임하여 남해읍성을 축성하였다. 1414년하동현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하동과 분리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편입,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2년 뒤에는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하고 현령을 두었다. 1419년(세종 1)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가 1437년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는 61호 271명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남해현의 민호가 738호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불과 15년 동안에 남해가 급속도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흥선도는 진주목 소속의 목장으로서 말 737두를 방목하고 있었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남해현은 진주진관 휘하에 들어갔으며, 현령이 절제도위를 겸임하였다. 수군은 제포진관(齊浦鎭管) 휘하의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통제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미조항(彌助項)에 수군첨사진을 설치했다. 그러나 왜구 때문에 한때 폐쇄했다가 1522년(중종 17)에 복구하였다. 이 무렵 기묘사화로 김구(金絿)가 남해도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막바지에 노량 앞바다에서 대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李舜臣)은 왜군의 퇴로를 가로막아 병선 400척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관음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633년(인조 11) 고을 사람들이 초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1658년(효종 9) 통제사 정익(鄭榏)의 명으로 사당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사당은 1663년(현종 4)통영 충렬사와 같이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다. 근년에 남해군민들의 정성으로 충렬사·관음포 등 충무공의 유적이 정비, 정화되었다.

임진왜란 후 흥선도는 창선도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진주목 소속의 말문리(末文里)02)에 합쳐졌다. 1759년(영조 35) 남해현의 호구수는 4,491호 2만 1,737명이었다. 1863년(철종 14)에는 진주민란에 호응해 농민 수천 명이 민란을 일으켜서 관아와 창고를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남해군으로 개편하였다. 1905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06년창선도를 창선면으로 승격하여 남해군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이예모(李禮模)의 주도하에 3월 3일 남해시장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1964년 1월 20일삼동면 미조출장소와 서면 중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68년한려수도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 4월 1일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이동면 상주리의 갈도(葛島)가 통영군 욕지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완공, 개통되었다. 이로써 남해군은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어, 본래의 농·수산업 이외에 관광지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남해면은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에는 창선교가 개통되어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1983년삼동면 난음리가 이동면에, 서면 연죽리 일부가 남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상주·미조 출장소가 각각 면으로 승격하였다. 1988년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상주면 상주리 일부가 미조면 송정리로 편입되었다.

 

주석]

주01 – 지금의 사천

주02 – 지금의 사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해군(南海郡)]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해군(南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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