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이동면 다정리, 남해읍 남변리·평현리·심천리를 비롯해 군내 각지의 해안평야와 창선도에까지 밀도 높게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섬이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690년(신문왕 10)에 신라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현(領縣)으로 설치했던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 혹은 西平)으로 모두 이때 개칭한 것이다. 1018년(현종 9)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영현인 난포·평산 양현은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다. 남해현도 1358년(공민왕 7)진주목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일명 鐥川 :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에 피란하였다. 창선도는 고려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라고 했다가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목의 영현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 흥선현(興宣縣)으로 개칭했으나 왜구 때문에 역시 살기는 힘들었다. 1269년(원종 10)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창선도에 수장했던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겼다. 고려 말 왜구의 침범이 날로 심해지자 1384년(우왕 10)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