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소재지 :남해읍 망운로 10번길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1 남해 향교6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남해 지식인들의 산실 남해 향교의 역사는 1450년(세종 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백 년에서 29년이 부족한 햇수다. 그때부터 지금 위치(남해읍 망운로 10번길)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한동안 방치되었다. 이것을 다시 재건한 때가 1669년(현종 10년)이었다.이후 향교는 꾸준한 증축과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 2008년에는 남해유림회관이 향교 앞길에 세워졌고, 향교와 함께 다양한 행사를 열어왔다. 1997년에는 <남해향교지>가 발간되어 남해 향교의 역사를 정리했다.남해 향교는 앞쪽에 명륜당(明倫堂)이 서 있고, 뒤편으로 대성전(大成殿)이 자리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향교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향교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군내에 있는 유일한 고급 교육기관이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해마다 예절 교육이나 인성 교육, 체험 프로그램들이 꾸려지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충효예 인성 교육이 마련되어 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비학당 10개 반이 개설되어 있다. 또 가장 중요한 기능인 석전대제가 봄과 가을 봉행된다. 또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분향(焚香) 행사가 있다.유교 문화 체험 행사도 매해 두 차례 열리는데, 군내와 군..
소재지 :이동면 난음로 219번길 7-14
■임종욱 작가의 남해 사우(祠宇)를 찾아서 #2 난곡사난곡사, 남해 유맥(儒脈)의 얼을 이은 유서 깊은 터전 이동면 난음로 219번길 7-14에 있는 난곡사(蘭谷祠)는 강진만이 멀리 보이는 넓은 들판 안쪽에 자리했다.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노거수(老巨樹)들이 사우를 감싸고 있어 연혁의 유구함을 대변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다.6월을 맞는 첫 날 난곡사보존회 회장 직임을 맡고 있는 이영태 회장과 함께 난곡사를 찾았다. 날씨가 쾌청해 탐방하기 좋은 날씨였다.난곡사는 사방이 야트막한 기와 담장으로 둘려 밖에서도 고개를 들면 내부가 훤히 보인다. 난곡사보존회가 설립되어 8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군청의 기본적인 지원은 받지만 관리자나 안내인을 두기에는 여력이 부족해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고 있다. 다만 빗장만 닫혀 있으니, 누구라도 참배하려면 들어갈 수 있다.난곡사는 1601년(선조 34)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때는 난계서원(蘭溪書院)으로 불렸는데, 군수공 이희급(李希伋, 1553~?)과 만호공 이희계 두 분을 배향했다. 이후 쭉 명맥을 이어오다가 1783년(헌종 9) 난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난계사도 훼철되고, 한동안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25년 4월 20일 백이정, 이제현, ..
소재지 :고현면 남해대로 3622-48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3 녹동사남해 학문의 뿌리를 이은, 정신의 고향 고현면 남해대로 3622-48(대사리 1041-1번지)에 자리한 녹동사(鹿洞祠)는 남해에 있는 일곱 개 사우 가운데 가장 늦게 터전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녹동사에 모신 세 분은 모두 남해에서 태어나 학문을 다졌고, 후학을 키웠기 때문이다.세 분은 모두 고현면에서 태어났다. 군 안에서도 특정한 지역 출신이긴 하지만, 등불이 방 안에서 비춰도 불빛은 아득히 뻗어나가는 것처럼 학덕(學德)이 한 면만의 거울일 수는 없다. 녹동사는 대사마을을 감싸고 있는 녹두산 서쪽 산허리에 기틀을 내렸다. 기자가 사는 곳도 고현면 탑동이라 걸어가도 10여 분이면 닿은 곳에 있다. 그러나 기자는 녹동사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리 지근거리에 있는 줄은 이번에 알았다. ‘등잔 밑이 어둡고’, 귀원천근(貴遠賤近)한 폐단에서 기자도 벗어나지 못했다.햇볕은 좋으면서 시원한 바람도 이따금 이는 녹동사에서 김기홍 녹동사보존회 총무를 만났다. 만나보니 전부터 아는 분이었다. 고현집들이굿놀음 공연을 할 때 자주 뵈었다. 회장인 박삼영 선생도 굿놀음 때 업잡이 역을 맡는 분이시다. 김기홍 총무는 녹동사는 마을의 세 분 어른, 석계(石溪) 김창성(金昌聲) 선생과 회산(晦山) 김유용(金裕鏞) 선생,..
소재지 : 미조면 남서대로 14-11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4 무민사나라와 남해를 지킨 세 분 장군을 모시다 무민사(武愍祠, 미조면 남서대로 14-11)는 충렬사와 함께 나라를 지킨 장군 세 분을 모신 남해의 사우다. 미조항으로 들어가는 길목 왼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무민사 앞에 서면 왼쪽으로는 시원하게 트인 바다가 들어오고 오른편에는 망산(해발 287미터)이 당당하며, 가운데로 미조초등학교와 미조면 시내가 나직이 이어진다.무민사는 보통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 1316-1388) 장군만 모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윤문(成允文, ?-?) 장군과 최헐(崔歇, 1564-1598[1599]) 장군 두 분의 신위도 함께 봉안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 분 모두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친 호국의 영령이시다.무민사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성윤문 장군의 꿈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성윤문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7년에서 29년(1594-1596) 미조진항에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어느 날 꿈에 노장(老將)이 나타나 나의 진영(초상)이 해안에 떠내려 왔을 것이니 이를 거둬 안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깨어나 사람을 보내니 과연 바닷가에 나무함이 있었다. 안에 진영과 명패(名牌), 장도(長刀)가 있어 해안 앞산(지금 이름 암살)에 초당 한 칸을 짓고 봉안했다는 것이다. 1..
소재지 :서면 중현리 1024번지
■임종욱 작가의 남해 사우(祠宇)를 찾아서 #5 운곡사남해에서 솟은 학문의 샘, 세상을 적시다 운곡사(雲谷祠)는 서면 중현리 1024번지(화방로 550-20), 도산마을에서 회룡마을로 가는 도로 중간 쯤 오른편 샛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나온다. 이 일대는 바다까지 상당히 깊고 긴 골짜기가 이어져 차를 몰고 지나가도 절경을 맛볼 수 있고, 걸어가면 굽이굽이 이어지는 감흥을 챙길 수 있다.운곡사는 1853년 운곡정사(雲谷精舍)란 이름으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해가 낳은 유학자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 1488~1547) 선생의 위패를 모신다. 당곡 선생은 1831년 함양에 있는 당주사(溏州祠)에 처음 모셔졌다가 운곡정사가 세워지면서 제자인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노진의 위패는 1975년 남원의 창주서원으로 옮겨졌다.운곡정사는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잠시 위축되었지만, 남해의 선비와 후손들이 뜻을 모아 1874년에 중창했다. 그러다 1916년 재건해 지금의 모습을 얼추 갖추었고, 이름도 ‘운곡사’로 바뀌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고 주차장을 닦아 사우의 면모를 어엿하게 일신시켰다.운곡사는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당곡 선생의 유업과 사상을 기리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운곡사가 있는 서면 중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