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화암 하준천(河準千) 1897년~1963년 화암 하준천 선생은 1897년 11월 1일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천동마을에서 부친 하일청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는데 입남조 신(남해현령. 1437년)으로부터 18세손이고 장남은 하준호로서 3.1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선생은 1913년에 남해 집영학교를 수료하였고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으며, 조국광복을 위해 걱정하시다가 독립당을 찾아간다는 곳이 천도교를 직접 찾아가 1914년 5월 25일 17세의 나이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진주 대교구에 영도자이신 묵암 신용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1916년에 진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사천군 서포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에 몸을 담기 시작하였다. 교직에 있으면서 묵암선생의 지도를 받아 1918년에 천도교 남해 전교실을 창립 하였고 조국광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3.1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를 규합코자 설천면의 윤도청, 윤병호, 정상기, 정훈도, 정재모 등과 밀의를 거듭하였고, 삼동면의 김일문, 하상근과 남해읍의 문창일, 김성준, 강한문, 박경수 등과는 긴밀한 연락으로 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9월에는 남해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함양하던 중 불온 사상자로 지목되어 교직이 면직되었다. 1920년에는 설천보통학교에 다시 취임하여 1923년에 학생들에게 조국의 혼을 불어..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유찬숙은 1891년 9월 9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이예모,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과 함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인근 동리에 알렸다. 4월 3일 오후 3시경, 군중이 남양리 노상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밀고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도 안 시위군중은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 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
출생지 :이동면 초음
1465~1527 이동면 초음 출신. 정치가. 초명은 이세걸(李世傑)이고, 자는 방언(邦彦)이며, 호는 율탄정(栗灘亭)이고, 본관은 장수(長水)다. 나중에 이충순(李忠純)으로 개명했다. 1486년(성종 17) 과거에 급제하고, 1491년 사간원 승지, 1495년 중추부사, 1504년 사간(司諫) 좌부승지 좌승지, 1505년 겸동지춘추관사, 1506년 전부부윤, 1510년 대사헌, 전라감사, 1513년 함양군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재직하면서 청렴하게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수록된 향현(鄕賢)이다.
출생지 :삼동면 내산
1922-1987 삼동면 내산 출신. 호는 금암(錦巖)이고, 본관은 전주다. 1943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1946년에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로 졸업했고, 1947년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1948년부터는 경무부에서 경찰간부로 활동하였고, 1958년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행정학과 학사, 196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5기를 거쳤다. 1960년 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6대, 7대, 10대, 12대 등 5선 의원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1958년~1959년), 대한축구협회장, 경향신문사장, 대한재향경우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출생지 :설천면 문의
1889~1774 설천면 문의 출신. 독립운동가. 1911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1909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회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외로 연락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사전 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 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으로 경찰서에서 2년 간 고초를 겪다가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8.15 광복 후 경상남도 농림국장, 농정과장 등을 지내다가 사임하고 조선염직 관리인, 원주잠사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기업을 경영했다.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남해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1974년 7월 13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 광복아파트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6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