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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8. (토) ~ 09. (일)

남해섬 유배를 자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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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장학순 (張學順)

  • 출생지 :남해읍 차산마을

1887~1952


남해읍 차산마을 출신. 1919년 4월 2일과 4일에 걸쳐 남해읍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설천면 문의마을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귀향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장학순은 이예모와 정순조(鄭順祚), 정몽호(鄭夢虎), 윤주순(尹柱舜) 등과 만나 4월 2일 거사일로 결정하고 인근 동리에 이 계획을 알렸다.
4월 2일 오후 3시경 주동자들은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남양마을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했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은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주재소에 밀고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도 알게 된 시위군중은 다음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 아침 일찍 장학순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7백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과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증원을 요청했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다가, 김치관의 소행을 알게 되면서 고현면 이어마을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했다.
시위를 주도한 장학순은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고, 1919년 9월 3일 부산지방법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복역하다가 1921년 3월에 출옥했다.
공훈을 기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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