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정몽호 (鄭夢虎)
1898~1984
설천면 문항마을 출신. 1919년 4월 2일과 4일에 걸쳐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정몽호는 1919년 3월 하순 설천면 남양마을 정임춘으로부터 3월 18일에 있었던 하동 3.1만세 운동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한 정임춘은 문항마을 정자(亭子)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정순조, 정몽호, 정학순, 유찬숙과 함께 첫 모임을 가졌다. 독립만세운동의 전말과 그 의의를 전하자, 전원이 동의로 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4월 2일을 궐기 일자로 정하고, 문항마을 솥곡에서 출발, 설천면 남양리 읍내로 진출해 그들은 태극기를 각 가정에서 500매 이상을 만드는 등 준비를 하기로 했다. 상기 지도자 다섯 명 외에 남양리 이예모, 진목리 정흥조, 류봉승, 문의리 윤주순, 금음리 정익주, 비란리 정재모 등 여섯 동지를 추가 규합했다. 규합된 동지들은 다시 부락민들에게 뜻을 같이하여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모두들 흔쾌히 승낙하고 투쟁할 것을 서약했다.
궐기일 4월 2일 오후 6시, 문항마을 솥곡에서 11명을 주축으로 100여 명이 집결했다. 군중들은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남양리로 행진하면서, 인근 부락민들과 합세했다. 이것이 남해군 독립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 소식에 놀란 경찰들은 이예모와 유찬숙을 붙잡아 설천면 주재소로 끌고 갔다. 끌려온 이들은 훈계를 받고 밤에 풀려났다.
지도자들은 이튿날 4월 3일 전열을 정비하고, 남해읍 장날인 4월 4일 새벽에 남양마을에서 출발했다. 오전 10시경 고현면 도마리를 경유하면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연창(連唱)했다. 남해읍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7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임춘은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이 해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