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진시황의 방사 서복과 서불과차
진나라 장양왕은 21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5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하였고, 그는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전설적인 지배자의 신성한 칭호를 취해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선언했다.
6개국 통합 순행비를 세우기 위해 도교의 성지를 찾아가서 동해를 바라보니 그 때 신기루가 나타났다. 진시황은 신기루를 보고 신하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그 곳은 신선이 계시는 곳으로서 해중에 삼신산이 있어 이름하여 봉래, 방장, 영주라 하옵고, 신선이 계셔수 불로불사약을 관장한다 하옵니다."
진시황은 신선들과 같이 영생불사 하고픈 생각이 간절하였고, 현실과 맞지 않는 꿈 같은 일이라 생각을 뒤로한 채 궁으로 갔다.
진시황은 마음이 늘편치 않고 불안하고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았고, 죽은 후를 위하여 지하에 궁전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조회 석상에서 말했다.
"짐이 오래 살아야 진나라가 태평하지 않겠느냐?"
송무기가 나서서 아뢰었다.
"동해바다 저 편에 삼신산 신선이 계시온데 그 곳에 불로불사약이 있다 하오니 이를 구해 복용하시면 영생하실 것이옵니다."
"짐도 삼신산 신선 이야기를 들은 바 있소. 그런데 경은 그 삼신산과 선인을 본 바 있는가?"
"신은 본 바 없사오나 방사 서복은 일찍이 동해 저편에 갔다가 신선들이 학을 타고 노는 것을 보았다 하더이다."
"그래 서복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신의 집에 머물고 있사옵니다."
"그럼 즉시 사람을 보내어 서복을 들라 이르라."
얼마 후 서복은 진시황 앞에 나타났고, 진시황은 서복에게 하명하였다.
"방사 서복은 듣거라! 삼신산 신선에게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하여라!"
"신 서복은 하명하신 분부 어김없이 이행하겠사오나 먼저 신선이 계신 동해바다를 건너자면 3천여 인이 승선할 수 있는 큰 배가 있어야 하옵니다."
"알았다. 동해 불로불사약을 구하는 일은 방사 서복에게 일임한다. 내일부터 공방을 차려 조선작업을 시작하라."
일은 시작되었다. 서북은 동남동녀 오백 명을 선발하여 오곡과 종자, 의약품과 공인, 필요한 물품 등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하였다.
서복은 고향으로 가서 여러 친지와 집안 어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셔놓고 말하였다.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선약을 찾아 떠난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올 수 없고, 그 때는 황제가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관계 있는 서씨 성을 가진 자는 모두 죽일 것이고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모두 고향을 떠나고 서씨 성을 내세우지 말아라."
이후로 서복촌 사람들은 서복촌을 떠났고 서씨 성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서복 일행은 산동성 낭야에서 출항하여 지금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금산 아래 벽련포와 두무포에 도착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금산으로 오른다.
방사 서복은 두모마을에서 계속을 따라 남해 금산 부소대로 올라가는 중턱의 넓은 바위에 서불기례일출로 해석되는 암각문을 새겨놓았다.
그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암각문이 불로초를 찾으로 온 서복이 금산을 지나 갔다는 서불과차 라고 남해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산에 도착한 서복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바로 산으로 오르지 않고 삼신제와 제천제를 정성들여 모시고 불로불사약인 불로초를 꼭 캘 수 있도록 소원했다.
그러나 서복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고, 이끌고 온 동남동녀 500명과 그 외 데리온 하인들을 모두 풀어 금산을 이 잡듯이 샅샅이 헤매기 시작하였으나 불로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죽을 것이 뻔한 일이고, 궁리 끝에 서복은 진시황에게 거짓 보고를 하게 된다.
"봉래산 신선에게서 선약을 구할 수 있었으나 섬 주변에 큰 상어 떼가 있어서 도저히 봉래산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황제께서 상어 떼를 사살할 활과 활 잘쏘는 궁수를 보내 주십시오."
이 보고서를 받은 시황제는 간밤에 바다의 신과 싸운 꿈 생각이 나서 꿈을 해몽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큰 상어와 용을 보았으니 제를 지내면 나쁜 신이 물러가고 좋은 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는 서복에게 활과 궁수를 보내고 직접 낭야로 가서 제를 지내고 상어와 비슷한 물고기를 활로 쏭아 죽이고 궁으로 돌아가서 그만 몸져 눕게 된다.
한편 서복은 금산을 거점으로 부족집단을 형성하고 남해 주변의 바다를 지키는 한편 선박 수 척을 보내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도록 하였다.
선단들은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자 영주산으로 불리는 제주도 한라산으로 옮겨 부로장생의 선약을 찾았지만 결국 차지 못하였고, 서복은 진시화의 멸령을 이행할 수없다는 불안함에 더 멀리 떠나기로 작정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일본 규슈 북쪽의 사가현은 서복의 최종 정착지로 알려져 있으며, 야오이 문화의 발상지이다. 서복과 함께 중국에서 건너온 일행들에 의해서 벼 경작 기술, 의학, 금속도구 제작 등 일본 문화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