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임분선의 처 열녀 연대
남해읍 평현리 어느 부자집의 사노 임분선은 박수무당의 딸 연대와 혼인을 맺자마자 곧 죽고 말았다. 과부가 된 연대는 비록 천한 처지였지만 여인으로서 지아비 둘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 절개를 지키기로 했다.
"얘야, 넌 너무 젊으니 어찌 평생을 혼자 살 수 있겠느냐. 양가집 며느리도 아니니 이제 그만 죽은 남편은 잊고 다시 시집 가서 아들 딸 낳고 살아가려무나."
"제게 자꾸 개가를 강요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천한 처지지만 지조마저 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딸의 처지가 안타까워 개가를 종용했지만 연대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부모의 개가 종용이 계속되자 연대는 슬피 울면서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집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시여. 더 이상 부모님의 성화를 견딜 방도가 없습니다. 이제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이루겠나이다. 부모님을 두고 먼저가는 불효를 용서해 주십십오."
연대는 하늘에 고한 후 피눈물을 흘리며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음을 택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이 나뭇잎을 붉게 물들었다. 다음해 봄이 되자 피눈물이 벌레로 변하여 잎마다 글자를 새기니 모두 열자였고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학 이완하와 무인 박동원이 그 뜻을 가련히 여기고 절개를 가상히 생각하여 뜻을 같이하는 50여 명과 함께 글을 지어 1728년 12월 남해현령에게 품신하니 이 사실이 점차 조정에까지 전해져 열녀 연대의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감동하여 1737년 정문을 세우라고 하명하였다.
남해읍 평현고개에 세워진 열녀문의 편액에는 "전략연대는 머슴살이 하던 분선이 처요, 부모는 모두 무당과 박수지만 집안의 풍습을 익히지 않고 홀로 눈속에 매화 같은 절개를 지켜 달리할 생각이 없어 날로 심중이 돈독해지니 절행과 아름다운 절조가 타고난 천성이 아니면 능히 듣기 어려웠던 일이다. 한 포기 연꽃이 언제나 깨끗하고 백척고송이 독야청정함과 같도다.
절행은 붓으로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 가르침이 어찌 도움이 적다 하리오"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