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3 녹동사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3 녹동사
남해 학문의 뿌리를 이은, 정신의 고향
고현면 남해대로 3622-48(대사리 1041-1번지)에 자리한 녹동사(鹿洞祠)는 남해에 있는 일곱 개 사우 가운데 가장 늦게 터전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녹동사에 모신 세 분은 모두 남해에서 태어나 학문을 다졌고, 후학을 키웠기 때문이다.
세 분은 모두 고현면에서 태어났다. 군 안에서도 특정한 지역 출신이긴 하지만, 등불이 방 안에서 비춰도 불빛은 아득히 뻗어나가는 것처럼 학덕(學德)이 한 면만의 거울일 수는 없다.
녹동사는 대사마을을 감싸고 있는 녹두산 서쪽 산허리에 기틀을 내렸다. 기자가 사는 곳도 고현면 탑동이라 걸어가도 10여 분이면 닿은 곳에 있다. 그러나 기자는 녹동사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리 지근거리에 있는 줄은 이번에 알았다. ‘등잔 밑이 어둡고’, 귀원천근(貴遠賤近)한 폐단에서 기자도 벗어나지 못했다.
햇볕은 좋으면서 시원한 바람도 이따금 이는 녹동사에서 김기홍 녹동사보존회 총무를 만났다. 만나보니 전부터 아는 분이었다. 고현집들이굿놀음 공연을 할 때 자주 뵈었다. 회장인 박삼영 선생도 굿놀음 때 업잡이 역을 맡는 분이시다.
김기홍 총무는 녹동사는 마을의 세 분 어른, 석계(石溪) 김창성(金昌聲) 선생과 회산(晦山) 김유용(金裕鏞) 선생, 몽와(蒙窩) 하한위(河漢緯) 선생을 모신 사우라 소개했다. 회산 선생은 증조부가 되셔서 어릴 적에 해타(咳唾)를 입었다고 한다.
녹동사의 연원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회산 선생의 문하생인 고창성(高昶錫) 등 52분이 강계(講禊)를 조직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960년에 정응조(鄭應祚) 외 20분을 중심으로 녹동사건립추진위가 꾸려졌고, 1965년에 낙성되어 석계와 회산 두 분을 먼저 모셨다가 1976년에 몽와 선생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낙성 때부터 석채례(釋菜禮) 향사가 이어졌는데, 처음에는 음력 3월 18일에 봉행하다가 2007년부터 양력 4월 18일로 날짜를 정해 지금까지 추념 행사를 가지고 있단다. 보존회 회원은 30여 분 되고,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20여 분만 모여 간소하게 치렀다. 후손들이 많이 고향을 떠나 있어 향사 때 참여 인원이 줄어드는 게 아쉽다고 김기홍 총무는 전했다.
세 분의 생애와 학문을 간단히 소개한다.
김창성 선생은 자가 덕수(德洙)고, 호는 석계다. 탑동에서 1867년 12월 10일 태어나셨다. 사람됨이 의젓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효성이 지극해 부모님 상 때도 비통함을 다했다. 우애도 깊었으며,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의 유덕을 되새기기도 했다. 글과 시에 뛰어났다. 아버지 수곡(睡谷) 김낙서(金洛瑞) 옹이 병환을 얻자 대신 죽겠다고 하늘에 기도했다.
집안일을 돌보다가 병을 얻어 1907년 5월 24일,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 때 조시(弔詩)를 올린 이가 수백 명에 이를 만큼 덕망이 높았다. 후손들이 1952년에 시문을 모아 <석계유고집> 1책 3권을 간행했다.
김유용 선생은 자가 영환(永煥)이고, 호는 회산이다. 1869년 9월 30일 탑동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가 남달라 8살 때 시를 짓고 글재주가 빼어나 크게 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도량이 넓었고,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의연해서 향리의 천거를 받아 경상도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다. 1907년 과거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섬사람’이란 이유로 낙방하는 일을 겪었다.
효성도 깊어 아버지 지련(池蓮) 김보원(金寶源) 옹의 상의 당해 3년 동안 복상(服喪)했다. 유림을 기리는 일에도 앞장서 운곡정사(雲谷精舍) 중건에 힘을 쏟았고, 유림계를 조직해 충렬사를 선양했다. 또 녹동재를 설립해 후학을 이끌었고, 여러 사우에서 강학했다. 1953년 정월 20일 84세로 별세했다. <회산유집> 2책 4권이 1955년 간행되었다.
하한위 선생은 자가 형서(亨瑞)고, 호는 몽와다. 1871년 3월 28일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천자문>을 외고 바로 뜻을 풀이해 집안을 일으킬 인재라는 찬사를 들었다. 어렸을 때 돌림병으로 앓다가 뒤늦게 할아버지 남경헌(南耕軒) 공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고 크게 한탄해 초하루와 보름이면 묘소를 살피고 기일마다 곡을 했다. 삼종숙부에게 양자로 나갔는데, 종중 일을 처리하면서 불편불당해 칭송을 들었다.
회산 선생과는 죽마고우로 일을 함께 했고, 1920년에는 향교 전교를 맡았다. 친부모님이 세상을 뜨자 애통함이 그지없었다. 충렬사 중건에 힘을 보탰고, 회산 선생과 함께 영호남을 다니면서 유림계를 청설하기도 했다. 부인이 세상을 뜨자 장례하면서 애도하는 시와 글을 남기는 등 금슬도 남달랐다. 1950년 12월 27일 79세로 별세했다.
남의 집 보물만 탐낼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존경할 만한 현인(賢人)들이 많다. 날이 좋을 때 마음을 내어 녹동사를 참배해도 뜻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