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임종욱 작가의 남해 사우(祠宇)를 찾아서 #2 난곡사
■임종욱 작가의 남해 사우(祠宇)를 찾아서 #2 난곡사
난곡사, 남해 유맥(儒脈)의 얼을 이은 유서 깊은 터전
이동면 난음로 219번길 7-14에 있는 난곡사(蘭谷祠)는 강진만이 멀리 보이는 넓은 들판 안쪽에 자리했다.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노거수(老巨樹)들이 사우를 감싸고 있어 연혁의 유구함을 대변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다.
6월을 맞는 첫 날 난곡사보존회 회장 직임을 맡고 있는 이영태 회장과 함께 난곡사를 찾았다. 날씨가 쾌청해 탐방하기 좋은 날씨였다.
난곡사는 사방이 야트막한 기와 담장으로 둘려 밖에서도 고개를 들면 내부가 훤히 보인다. 난곡사보존회가 설립되어 8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군청의 기본적인 지원은 받지만 관리자나 안내인을 두기에는 여력이 부족해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고 있다. 다만 빗장만 닫혀 있으니, 누구라도 참배하려면 들어갈 수 있다.
난곡사는 1601년(선조 34)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때는 난계서원(蘭溪書院)으로 불렸는데, 군수공 이희급(李希伋, 1553~?)과 만호공 이희계 두 분을 배향했다. 이후 쭉 명맥을 이어오다가 1783년(헌종 9) 난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난계사도 훼철되고, 한동안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25년 4월 20일 백이정, 이제현, 박충좌, 이희급 네 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로 다시 태어났다. 난곡사창건기에 따르면 이때 힘을 합친 사람은 최정호, 송헌장, 류정희, 하달용 등 12분이라고 한다.
난곡사가 향사하는 네 분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 분은 이희급 선생이다. 선생은 1553년(명종 8년) 지금의 남해군 이동면 난양리에서 아버지 이인충과 어머니 진양하씨 슬하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고, 자는 중사(仲思), 호는 난계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학문이 출중하더니 23살(1576) 때 생원 진사로 성균관에 입학했고, 29살(1582) 때에는 남해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해는 도성에서 워낙 먼 데다 주로 군사적 요충지로 유배지여서 공부하는 선비는 적지 않았지만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에 급제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 두 일에서 선생은 모두 최초의 인물로 우뚝 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개령(지금의 문경)현감에 올랐고, 함양군수와 경사도사 등을 역임했다. 문과 출신이었지만 나라의 환란을 당해 앞장서 왜적과 싸우다가 진도 벽파진에서 순절했다. 이 공을 기려 1605년(선조 35)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졌다. 이 녹권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37호로 등록되었고, 남해유배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창 모내기철이라 난곡사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영태 회장은 매년 음력 3월 10일 향사를 모시고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오지 못하고 30여 명이 모여 제례를 봉행했다고 전했다.
난곡사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마당을 가운데 두고 도동재(道東齋)가 가운데 서 있고, 오른쪽에 보령각(保靈閣), 왼쪽에 동재(東齋)가 있다. 보령각은 난곡사에서 직임을 맡았던 분들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고, 동재는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도동재 뒤편에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난곡사 건물이 있다.
건물 안에는 왼편부터 이희급, 백이정, 이제현, 박충좌 네 분의 신위가 간소하게 모셔져 있다. 이제현, 박충좌 두 분은 고려 말 때 유학을 대표한 인물이지만, 남해와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백이정은 남해 남면에 그의 묘소로 알려진 유택이 있는 것처럼 남해에 유배를 와 죽었다고 하는데,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이태영 회장은 말했다.
이희급 선생과 같은 장수 이씨인 이태영 회장은 난곡사의 유래와 자신만이 아는 난곡사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올해 5월부터 회장 직을 맡아 난곡사 선양에 앞장서고 있는데, 예전만큼 난곡사가 주목을 받지 못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당장 사우 앞에 참배객들이 오면 주차할 공간이 비좁아 논을 사 주차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비용 마련도 쉽지 않고 다른 여러 사정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남해 유학이 세상에 알려지는 기틀을 마련한 분들을 모신, 의미 있는 문화유산인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얼을 기리고 배우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남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그 안에서 여러 선비와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그 기상은 지금도 군민 마음속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그 얼이 깃든 이곳이 있기만 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이 이어지는 성소(聖所)가 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