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보리암
■ 보리암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하고 수도하시던 절로서 금산(錦山)의 한복판에 관음봉을 기대고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
바위의 장엄한 기운이 뭉쳐 의젓한 모습으로, 용을 타고 전후좌우 절을 하는 남순동자 바위와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을 거느리고 남쪽바다 용왕에 무슨 가르침을 내리는 듯하다. 보리암은 이런 바위들을 등지고 놓여 있다.
원래는 남해 보광산상 관세음보살 시현(示現)도량으로 그 옛날에 원효대사께서 이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부르고, 동록(東麓)에 범우(梵宇)를 지어 보광사라 불렀다.
그 뒤에 조선태조 이성계가 기도하여 왕위에 오른 일을 감안하여 이씨왕조의 원당으로 또한 호국기원도량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생긴 그대로 절이며, 바위머리마다 자연법당인 이곳은 그늘이 짙은 사부대중들의 기도 수도처라 할 수 있으니 뉘라서 이곳을 아니 그리워하랴.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어왔으니 고대의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며 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출가하여 남해 낙가산 금산(錦山)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불교 남방전래설(南方傳來設)을 증명하는 것으로 북방전래설(고구려 소수림왕 2年·AD372)보다 292년 앞섰다. 그리하여 수많은 출세도인과 현인달사가 여기를 찾아와서 수도하여 가피력을 얻은 이가 헤아릴 수 없다. 옛날에는 사명(寺名)이 상도솔암, 의상암으로 지명사전(地名事典)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여러 번 고쳐짓고 손도 많이 보았으며, 그 후 양소황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1966~1985年) 보광전, 산신각을 중창(重創)하고, 간성각, 범종각, 보리암요사, 의상대 등을 신축하였다.
그 후 명도각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진입로 개설 극락전 창건, 해수관음상을 건립하였으며, 동욱(東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탑대 가는 길의 돌계단 공사, 탑대 주위 돌담 축조공사, 극락전 지하 하중보강공사 등을 시공하였다.
묘유(妙有)스님이 2000년 주지로 부임하여 그간 보광전을 중수하고 의상대, 관음원 간성각, 산신각을 중건하였으며 설법전을 신축하였다. 2010년 능원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극락전 개금불사와 예성당 영단 및 굴법당을 조성하고 석불을 봉안하여 기도 도량의 면모를 쇄신하였다.
▶ 보리암의 창건주 원효대사
원효스님은 삼국간의 전쟁과 통일의 격변기였던 7세기에 살았으나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으며, 1백여부 2백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요 대학자였다.
스님의 성은 설씨로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 현재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 불지촌(押粱郡 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요 담내(談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송(宋) 고승전」의 기록에 의해서 15세쯤 출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간직하고 있던 스님은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으나 학문범위는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유가서(懦家書)와 도가서(道家書)에도 상당히 밝았음을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혜공과 대안 두 스님으로부터는 무애행을 통한 대중교화와 거리의 교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스님은 진리의 벗,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45세(661년)때 다시 시도했으나 남양만이 멀지 않은 적산의 한 무덤 속에서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라고 깨달은 후 의상스님을 뒤로 한 채 돌아와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대중들로부터 왕실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스님의 일생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신혈사(神穴寺)에서 입적(入寂)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