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소재지 :남면 당항리 1473-4번지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6 율곡사성현의 가르침으로 울려 퍼지는 향약의 메아리 율곡사(栗谷祠)는 남면 당항리 1473-4번지(남서대로 770-16) 면사무소가 있는 오른쪽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큰 길에서 가는 길은 비좁고, 뒤편으로 사우까지 가는 도로가 넓혀져 차로도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주차장이 없어 아쉬웠다.율곡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율곡 이이(李珥, 1536-1584)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율곡이 남해를 찾았거나 유배를 왔다는 기록이 없는데, 어쩐 일로 이곳에 선생을 모시게 되었을까?율곡은 조심스럽게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자치를 제안했다. 관청과 관리가 지역을 관할해 운영하는 것도 좋지만, 지역의 백성들과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선행을 권면하고 악행을 교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다만 시기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꼭 율곡의 견해 때문은 아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유향소(留鄕所)나 향교(鄕校) 같은 지방 자치기관이 있어 풍기(風紀)를 바로잡기도 했다.율곡사는 1968년 3월 15일에 정식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을 기초로 한 향약계(鄕約契)가 율곡이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운영했는데, 이후 남해에도 각 면마다 결성되어 정착되었다고 ..
소재지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임종욱 작가의 남해사우(祠宇)를 찾아서 #7 충렬사이곳은 남해의 얼이 서린 곳,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더 이상 안내가 필요하지 않은 충렬사는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노량로 183-27)에 있다. 1628년(인조 6) 남해의 뜻있는 선비 김여빈(金汝贇) 옹과 고승후(高承厚) 옹 두 분이 초옥 한 칸을 지어 추모한 일에서 충렬사의 단초는 열렸다. 1658년에 신축되고 노량서원이 세워져 사우를 관리했는데, 서원은 대원군 철폐령 때 훼철되고 말았다.이후에도 다양한 선양 사업이 펼쳐졌다. 심지어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 강점기 때도 민족 영웅을 숭앙하는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성역화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973년에는 유허지와 본사(本祠)가 대한민국 사적 232호와 제233호로 지정되었다.충렬사를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은 모충회(慕忠會)에서 출발했다가 2005년 사단법인 남해 충렬사로 확장되었다. 회원은 현재 150여 명에 이른다. 제4대 박정문 이사장이 2014년 선임되어 강광수 사무국장과 함께 선양 사업을 이끌고 있다.충렬사의 중요 행사로 4월 28일의 탄신일 다례제와 12월 16일 기향제(忌享祭)를 모시는데, 이때 군청으로부터 제수 비용을 지원받는단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행사를 축소하여 봉행했다. 충무공의 순국은 생명의 끝이 아닌 불멸의 시..
소재지 :남해읍
■임종욱 작가의 남해 금석문 이야기 #1 남해읍남해의 산 역사, 돌에 새겨 길이 남기다-봉천사묘정비, 박진평시혜비, 선소축항기념비, 장량상동정마애비 남해 금산을 바다에서 보면 머리에 온통 돌을 이고 있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중턱부터 정상까지 온갖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남해 사람들은 그 풍경과 돌의 형상마다 이름을 붙여 ‘금산 38경’이라 부른다. 부소바위, 상사바위, 흔들바위, 좌선바위 등 이름만으로도 상상을 불러일으킨다.이런 바위들은 자연이 빚어낸 선물이지만, 사람들이 손으로 다듬고 깎아 글을 새긴 돌들도 있다. 이를 금석문이라 하는데, 남해에는 수백 개가 흩어져 있다. 개인 묘지에 있는 비석까지 합치면 엄청난 규모일 것이다.돌에 글을 새긴 까닭은 그 내용을 오래 보전하기 위해서다. 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내용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돌에 새겨진 숨은 역사를 찾는 첫 날, 남해읍 주변에 있는 금석문 몇 개를 살펴보았다. 먼저 찾은 곳은 유배문학관 초옥 앞뜰에 선 <봉천사묘정비>(군 보호문화재 3호)다. 이 비석은 높이만도 2미터 86센티로 곁에 서면 육중한 느낌을 준다. 1828년 세워졌으니 거의 2백 년 세월을 살았다.봉천은 유배문학관 뒤편을 흐르는 개천 이름이다. 그 개울 ..
소재지 :미조면
■임종욱 작가의 남해 금석문 이야기 #2 미조면미조진항 수군과 장령들의 호국 얼을 되새기다 미조는 오래 전부터 군항(軍港)으로 국토의 남단을 지키는 첨병으로서 구실을 다해왔다. 전란이 일어날 때면 위란의 현장으로 달려가 신명을 다했고, 수많은 수군과 장령들의 숭고한 땀과 피가 곳곳에 어려 있다.이런 점에서 미조는 호국의 현장이자 국토 수호의 파수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역사의 맥락은 미조면에 남은 금석문의 흔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미조항에 들어서자면 고려 말기 왜구를 섬멸했던 최영 장군을 모신 무민사를 참배하는 길부터 찾게 된다. 무민사 안에는 미조에 근무했던 첨사(僉使) 등 일곱 분의 선정비, 불망비 등이 모여 있다.그러나 기왕 답사의 여정을 잡았다면 좀 더 먼 곳에서 출발해 발걸음을 옮기는 편이 좋다. 미조면의 금석문은 대개 도로 가까이 이어져 있어 하이킹을 하듯 걸으며 탐방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선정을 베풀고 적군을 물리친 두 첨사 송남마을 도로변 송정해수욕장 입구에서 미조 방향으로 30미터 쯤 가면 왼쪽 언덕에 마애비로 된 <가선대부행첨사김후계홍청백선정비>를 만나게 된다. 마애란 천연 바위를 갈아 글을 새겨 넣었다는 뜻이다.이 선정비는 1853년 2월에 고을 사람들이 세웠다고 되어 있는데, 스스로 근검함..
소재지 :남해군 고현면
■임종욱 작가의 남해 금석문 이야기 #3 고현면옛 현청의 추억을 따라 금석문의 자취를 밟는다 고현면은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유서 깊은 고장이면서 오랜 기간 현청이 자리한 고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남해를 들고나는 길손들을 맞고 보낸 역사의 현장답게 고현면에도 찾아볼 만한 금석문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읍과 인접한 이어마을에는 고을을 다녀간 현령과 관리들의 불망비와 마을에 큰 도움을 준 여성의 혜시비 등 5기가 모인 비석군이 있다. 1784년 8월에 세워진 <통상국이공한창구폐불망비>를 비롯해 1891년 세워진 <행현령박후준성영세불망비> 등이 있지만, 주목을 끄는 비석은 1912년 8월에 면민들이 세운 <숙부인진양정씨혜시비>다.진양 정씨가 어떤 고마운 일을 했는지 비석에는 나오지 않지만, 비문에 “특별히 집안 재산을 내놓아서 / 선행이 이어지니 감동이 피어났네. / 집집마다 세금을 다 없앴으니 / 높이 이름을 떨침도 당연하네.”란 글귀로 보아 마을 사람들의 소작료를 면제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원래 이 5기의 비석은 도로변에 ‘통일공원’이라 이름해 모아두었는데, 19호 국도가 확장되면서 조금 안쪽으로 옮겨졌다. 별다른 표지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워 아쉽다. 금석문은 콘크리트 기반 위에 올렸는데, 남해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