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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8. (토) ~ 09. (일)

남해섬 유배를 자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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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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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원복생 (元福生)

  • 출생지 :남해읍 북변동

1892~1937


남해읍 북변동 출신. 1919년 4월 4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미 4월 2일 이예모(李禮模), 정순조(鄭順祚), 정학순(鄭學淳), 정몽호(鄭夢虎), 윤주순(尹柱舜) 등의 주동으로 이웃 설천면 남양마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날도 저물고 고현면장 김치관(金致寬)의 밀고도 있고 하여 남해읍까지의 시위행진을 중도에 포기하고 다음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거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 그는 이 계획을 알고 아침 일찍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7백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 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군청과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이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했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다가, 김치관의 소행을 알고는 이어마을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했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고, 이해 9월 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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