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유찬숙(柳贊淑)
유찬숙은 1891년 9월 9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이예모,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과 함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인근 동리에 알렸다.
4월 3일 오후 3시경, 군중이 남양리 노상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밀고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도 안 시위군중은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 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9월 23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휘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7년 3월 21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