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노루목전투 제주좋네 재주좋네 남해 사람 재주 좋네. 하루 밤에 통문 돌아 목 앞에다 진을 치고 만인간을 모아 놓고 김장방이 모은 군사 한윤서가 호걸 일세 영구영포 김영포야 많은 군사 다 어쩌고 임술군만 낮잠 자네. 위 민요는 1984년에 작고한 조금악(1895년생)여사 에 의해 전해진 구전민요 이다. 이 민요가 말해 주듯 이 임진왜란 때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남해 안을 가로 질러 사량도 앞바다를 지나 남해도로 진입 했는데 그들이 먼저 해야할 일은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원래 큰 곡창은 호남지방인데 거기에 이순신 장군 이 지키고 있는 좌수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사천만 을 통하여 육로로 곡창을 점령하기 위하여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당시 남해에는 정부양곡을 수집하던 둔촌 과 그 식량을 배로 실어 나르는 창선면 해창이 있었 다. 이 두 지역은 바로 같은 해협에 위치해 있기 때 문에 이곳을 먼저 점령하기 위하여 당시 일본군선의 일부가 이 피항지에 들였다는 것이다. 라오고 전황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남해 쪽에서 연기가 심상찮아서 몰래 정탐군을 보냈더니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 으로 갔고 나머지 군사들은 질겁하여 곳곳에 불을 지르고도 그때 도망가지 않고 고향을 지키면서 남아 있던 민간인들 노루목에 정박한 왜군을 치기 위..
김정려 처 정씨는 진양 정씨로 이름은 소사(召史)이다. 설천에서 이동면 영지로 시 집은 지채 2년도 못되어 남편이 갑자기 이름 모를 병이 들었다. 정씨는 여러 곳을 찾 아다니며 갖가지 약을 구해 정성을 들여 달여 드렸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결국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러 넣는 단지주혈( 하면서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한 그의 정성 血)까지 이 하늘에 통했는지 남편의 생명이 3일간이나 연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중병 이라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남편과 사별한 정씨는 너무나 애통해 하며 남편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시묘살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씨는 남편의 묘 곁에 움막을 짖고 밤낮으로 떠 나지 않고 지키고 보살피며 3년간의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 하는 동안에는 여인의 몸인지라 항상 몸에는 은장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몸을 지켰다. 남장을 하고 묘를 지키는 정씨의 모습은 죽은 사람보다 더한 돌들이었다. 정씨 를 본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주장같은 절개는 변함이 없었고 뼈와 살을 깎는 3년 간의 시묘살이를 마쳤다. 친정 집안 사람들은 정씨가 아직 젊고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병수발을 하였 고, 사후에 시묘살이 3년을 마쳤으니 개..
노도와 벽련마을 사이의 물길 중 가장 가까운 곳에 망노대라고 불리는 곳이 있 다. 전화나 전기가 없던 시절 최근까지 이 곳에서 큰 소리로 “아무개야! 배 타고 오너라" 하고 고함치면서 육성으로 통신을 했던 곳이다. 옛날에 큰 양반이 노도를 건너야 하는데 바람이 세어 파도가 높이 일어 노 젓는 배는 올 수가 없고, 온다 한들 파도 때문에 배를 접안할 수 없는 상황이라 멍하나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 망노대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 큰 양반이 바로 서포 김만중 선생이라고 한다. 노도 큰골 북쪽 산중턱에 있는 평평한 곳을 노시나묏등이라고 부른다. 옛날 어 느 노인이 노도 큰골을 찾아와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 노인은 하루종일 하는 일 없이 방 안에 있으면서 글을 읽고 쓰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번 나오면 산등성이에 올라와 바다를 바라보며 한양 하늘을 향해 한숨만 쉬고 있 어 마을 주민들이 '노자묵고 할배' 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이 노인이 병들어 죽자 마을 사람들은 큰골 산등성이에 묻어 주고 이 곳을 노지나묏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노도 사람들은 이 노인이 서포 김만중이라 고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묘를 이장해 간 자리 주변에는 잡목이 ..
소음야리 통의 해불 대량마을 뒤쪽 해안선에 항아리 모양의 동굴이 있었다. 중심부 아래는 좁고 윗 부분에 큰 항아리를 뒤집어 세워둔 것 같은 바위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미륵바위로 불렀다. 소치도의 미륵바위와 남면 가천마을 미륵바위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고 하고, 대량 해불, 소치도 미륵불, 세존도의 부처를 남해바다를 지키는 삼존불이라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7년 7월 15일 태풍 '셀마' 때 큰 바위 해불이 간 곳이 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잠수부를 동원하여도 찾을 수가 없어 마을 사람들은 용왕님이 데려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원효대사와 상주 원효대사가 금산 보리암에 머물면서 화엄경을 강론하는데 여러 곳에서 온 중생들이 안주할 곳을 물으니 '신하상주'라 하면서 먼 훗날 큰 고을을 이루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이에 타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름을 상주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상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천마을 미륵불에게서 탄생한 미륵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상주하면서 불법승의 삼보를 완성할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삼보의 볼보는 모든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법보..
상주면 사남단해안 절벽에는 용왕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상주바다를 지키는 용왕은 바위와 바다가 만나는 절벽의 바위를 거북모양으로 떼어내어 생명을 불어놓고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하얀 무인등대 아래에는 거북 모양으로 깊게 파인 거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서쪽으로 가면 비룡계곡을 향해 용처럼 길게 누운 용왕바위가 있고, 용왕은 거북을 타고 놀기도 했고, 용을 타고 놀기도 했다. 비룡계곡은 용이 용왕를 타고 승천했다는 주상절리이다. 비룡계곡은 용이 승천하면서 비늘로 깍아놓은 듯한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바다에 있어야 할 용왕이 하늘로 간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비룡계곡에 맺힌 고드름이 녹을 때 그 물을 받아 마시면 총가의 상사병이 씻은 듯 사라지고 백년해로의 송원을 이룰 수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비룡계곡 주변에는 용왕이 살았다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용굴이 있고, 시집온 여자들이 세 번 절했다는 메주바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