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호두산은 남해읍 광포마을 동쪽을 감싸고 있는 해발 238.7m의 산이다. 호두산의 상층부는 바위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호랑이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바위굴에 부엉이가 많이 살고 있어 부엉산이라고 한다. 이 산에는 묘를 쓸 수는 있지만 입석을 하지 못한다는 금기가 있으며, 비석을 세우기만 하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남해읍 곡내마을에 욕심 많은 부자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스님이 와서 동냥을 청해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이 할아버지를 망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집터에다 묘를 쓰면 더 많은 재물이 모일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 곳은 다리미터라서 사람이 살면서 불을 때 주어야 하는 터인데, 더 큰 부자가 된다는 말에 이사를 하고 난 후에 집터에 묘를 썼다. 그랬더니 갑자기 할아버지가 기생첩을 얻고 바람을 피우더니 집안이 망해버렸다고 한다. 옛날 대입현에 대숲이 우겨져 있고 연못에 연꽃이 피는 경치좋은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함안 조씨 입남시조가 살던 집이었고, 입남시조 조낭청이 통영목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 후 조낭청은 남해로 유배오게 되었고, 남해에 유배 중이던 어..
남해읍 평현리 어느 부자집의 사노 임분선은 박수무당의 딸 연대와 혼인을 맺자마자 곧 죽고 말았다. 과부가 된 연대는 비록 천한 처지였지만 여인으로서 지아비 둘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 절개를 지키기로 했다. "얘야, 넌 너무 젊으니 어찌 평생을 혼자 살 수 있겠느냐. 양가집 며느리도 아니니 이제 그만 죽은 남편은 잊고 다시 시집 가서 아들 딸 낳고 살아가려무나." "제게 자꾸 개가를 강요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천한 처지지만 지조마저 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딸의 처지가 안타까워 개가를 종용했지만 연대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부모의 개가 종용이 계속되자 연대는 슬피 울면서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집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시여. 더 이상 부모님의 성화를 견딜 방도가 없습니다. 이제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이루겠나이다. 부모님을 두고 먼저가는 불효를 용서해 주십십오." 연대는 하늘에 고한 후 피눈물을 흘리며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음을 택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이 나뭇잎을 붉게 물들었다. 다음해 봄이 되자 피눈물이 벌레로 변하여 잎마다 글자를 새기니 모두 열자였고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학 이완하와 무인 박동원이 그 뜻을 가련히 여기고 절개를 가상..
남해읍성 동문 안에 '칠선당골목'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일곱 명의 시녀 또는 미녀를 모신 사당인 칠선당에서 넋을 기리는 제향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곱 시녀의 혼령이 회화나무로 옮겨갔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일곱 그릇의 메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의식이 동제로 변해 매년 음력 10월 10일 일곱 시녀의 넋을 기리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천장군과 일곱 시녀의 이야기이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조선 제20대 경종의 왕비와 궁녀가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졌다. 경종은 딸을 낳는 사람은 귀양을 보내겠다고 미리 공표했다. 경종의 기대와는 달리 왕비가 딸을 낳고 궁녀는 아들을 낳고 말았다. 경종은 어쩔 수 없이 왕비를 전라도 여수 대경도로 귀양을 보냈다. 훗날 경종은 의심을 품고 암행어사 박문수를 여수로 보내 사실여부를 다시 확인하게 하였다. 어사 박문수는 궁녀가 교묘한 방법으로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딸을 낳은 사람은 왕비가 아닌 궁녀였다. 왕비는 유배에서 풀려나고 궁녀가 전라도 여수 대경도 아래 소경도로 귀양을 떠났다. 왕은 궁녀를 감시하기 위해 천장군과 일곱 명의 시녀를 딸려 보냈다. 왕의 성은을 입지 못하고 대궐에서 쫓겨난 궁녀는 유배지에서 밤마다 처소를 나와 남자와 교유하면서 부정한 행동을 ..
■임종욱 작가의 남해의 전통연희 탐방 #1 선구줄끗기중단없이 이어져야 할, 남해 민속연희의 물결 초여름의 햇살이 화창하다 못해 따가울 정도로 쾌청한 월요일 오후 1시 35분, 남면 선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선구는 어촌의 안온하면서도 서정적인 정취를 한껏 뽐냈다. 금석문 조사를 위해 찾은 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선구는 남면에서도 제법 큰 마을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남해의 유일한 경남 무형문화재(제26호, 2003년 지정)인 선구줄끗기가 전승되어 의미가 크다. 세상이 광속으로 변하고 미래를 따라잡기에 다들 분주해도,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오늘이 어디에서 왔는지 찬찬히 되새겨보는 시간도 절실하다.전화로 약속한 남해선구줄끗기보존회(회장 정군삼) 사무국장 박영수 님은 우연찮게 도착하자마자 만났다. 도로변에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남해군 보호수 12-22-4-1) 그늘 아래 경운기 부품을 고치고 있는 분께 공공화장실을 물었는데, 연락하니 그 분이 사무국장이었다.평소에는 생업에 열심이다가 길일이 되면 소매를 걷고 연희의 현장에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 그런 이들의 열성과 품앗이가 우리 고유의 민속연희를 여전히 힘차게 맥동하는 만드는 원동력이다. 인사를 하니 삶을 끈끈하게 지탱하는 사람의 굳은살이 표정에서 느껴졌다.줄끗..
■임종욱 작가의 남해의 전통 연희 탐방 #2 고현집들이굿놀음간단없이 이어져야 할 축제의 물결 고현집들이굿놀음은 유래가 무척 오래된 전통 연희다. 원래 출발은 고현면 오실마을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오실집들이굿놀음’이라 불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 집을 짓고 집들이 연희를 열면서 집안의 복록을 부르고 마을의 안녕과 무탈함을 기원하려는 데서 발상했다.놀음에 필요한 음식이며 술과 안주 장만에 드는 비용은 집들이를 하는 집안에서 내지만, 참여는 동네 사람 모두가 함께했다. 그만큼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네 전체의 경사로 인식한 탓이 컸다. 현재는 5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각자 구실을 맡아 참여하는데, 예전에는 그 인원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놀음의 진행을 보더라도 한 집안의 잔치만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매구패가 앞장서고 집안과 동네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그 뒤를 따른다. 동네 어귀에서 상쇠가 우렁찬 함성으로 시작을 알리면 매구패는 동네 당산나무와 공동우물부터 들려 마을의 무병장수와 영세안녕을 기원한다.그런 뒤 집안으로 들어가 부엌이며 곡식창고, 장독대 등을 다니며 집안의 미래를 축원한다. 이어 재액은 막아내고 행복은 지켜주는 ‘업’을 맞이하는 과장을 진행한다. 업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