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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8. (토) ~ 09. (일)

남해섬 유배를 자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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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석

소장 박성석

안녕하세요.
지역사연구소장 박성석입니다.

남해문화원 부설 연구소인 지역사연구소는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며, 이를 바탕으로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 사회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를 통해 남해의 문화유산을 재조명하고, 후대에 전승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사연구소는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미래 세대에 전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민과 함께하는 열린 연구소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중현 65년사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4.08

조회수8

첨부파일

중현초등학교의 65년사 발간에 동문회장님과 동문들의 협조와 노고에 깊은 찬사를 드리면서 지난날을 회고하건데 길게 남북으로 뻗은 서면의 지리조건은 중앙에 자리잡은 하나의 학교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교를 서상에 분교를 중현에 설립키로 한 것이 중현초등학교의 출발이었다. 당시 남상리에 위치했던 성명보통학교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 2학급 4년제로 학생수는 약 90명 정도였다. 타면에서는 6년제를 앞서 실시했는데 서면만은 아직도 4년제였다.

교육은 지역발전의 근본인데 우리 선배들은 앞날의 발전에 대하여 미처 생각이 못 미쳤을까 하고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그로 인해 4년을 졸업하고 고현면으로 남해면으로 5학년에 편입학을 하면서 고생들이 많았었다.

1939년 6년제 인가가 났으나 이웃 고현면보다 5년이나 늦었다. 이 무렵 6년 졸업을 위해서 먼저 4년을 졸업한 학생들이 많이 편입을 하여 두번 졸업한 학생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졸업생 명단에서 보면 알 수 있다. 학교설립 당시 학교부지 문제에 대하여 선배들의 설정이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이 부족했던 것은 훗날 해변통에 이전 설립하면서 절실히 느겼다.

1944년경에 향학열이 높아지면서 입학 희망자가 많아지자 국민학교 부설 학술강습회를 설치하여 2학급 100명이 한꺼번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 강습회 학생들은 1945년 5월 정규 국민학교 학생으로 편입되었다. 학교 통학구역은 처음은 남상리 이북이었는데 남상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유포리 이북으로 변경되었다. 서면 4개 국민학교중에서 가장 학구가 넓고 학생수도 많았다. 중현국민학교 전성기였던 1970년 무렵의 학생수는 880여명으로 추정 됨 그랬던 학생수가 이제 36명이라니 너무도 감개무량하다.

일본 교장이 두분 있었다. 학교에서 일본 말만 쓰게 하는 그 당시 식민지 정책이 강요되고 교장의 권리가 대단했다. 후회스럽게도 1945년 8월 16일 고성군으로 전근되는 일본교장(후꾸다 시치로)을 노구해안에서 가재도구와 함께 선박에 실어 전송하고 학교에 올라오니 시간이 오후 3시가량 되었다. 그때였다!! 노구쪽을 바라보니 꽹가리를 치면서 돌아오는 군중들의 열광된 모습! 저기 무엇이냐? 어찌된거냐? 해방이다!! 어제 해방인데 오늘 오후에야 알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의 통신정보가 이랬었다. 직원실 천장에 설치한 신단의 흰천을 떼어내어 태극기를 급히 만들어 환영을 나갔다. 이로써 일본 식민지 교육은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의 중현국민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