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출생지 :이동면 석평마을
1889~1953 이동면 석평마을 출신. 1919년 4월 4일 새벽에 설천면 남양마을을 출발한 독립만세 시위대가 오전 10시경 고현면 이어마을에 이르자, 시위대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들고,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시위대를 진두지휘해 이날 남해 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하상근은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이 해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출생지 :고현면 포상마을
1887~1942 고현면 포상마을 출신. 1919년 4월 4일 새벽에 설천면 남양마을을 출발한 독립만세 시위대가 오전 10시경 고현면 이어마을에 이르자, 시위대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들고,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시위대를 진두지휘해 이날 남해 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하준호는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이 해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출생지 :삼동면
1919~1973 본적 미조면 미조리 293번지. 삼동면 출생. 고아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에 의해 조병걸(趙炳傑)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하였다.이때 그는 회양(淮陽)에서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군납을 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부대를 자유럽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점으로 일본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해 보고했으며, 개봉(開封)과 귀덕(歸德), 서주(徐州) 지역에서 초모공작 활동 및 적후방 교란작전 등을 전개하였다.또한 반일선전과 유격대 첩보활동, 회양성 탈환공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중 비밀이 누설되어 회양성 탈환공작의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북경(北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출감하였다.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표창이 추서되었다.
출생지 :이동면 신전마을
1921~1951 이동면 신전마을 출신.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1841년 1월에 임굉(林宏), 이태길(李泰吉), 정세파(張世播) 등 동교생들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 소재 이무영(李茂榮)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하였고,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 매월 10ㄷ일 연구발표, 하급교양 및 동지 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고,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이때 그는 수학부 책임을 맡았다.또 졸업한 뒤 교사로 부임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 교육을 실시해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했다.1941년 3월 졸업한 뒤 경남 남해군 소재 중현공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그해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가 비밀결사의 전무가 드러났다. 이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