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서불과차에서 금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통천문을 지나면 부소대가 우뚝 솟아 있고,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진시황은 장남인 부소에게 황제를 계승시키라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하지만 진시황의 어가 책인자인 조고는 막내 아들 호해와 승상 이사를 설득해 유조를 조작하여 호해를 황제로 웅립하려고 했다. 그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시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순행을 계속했다. 때는 여름이었고, 시체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어 소금에 절인 마른 생선을 100근 넘게 마차에 싣고 생선 비린내로 시체의 냄새를 못 맡게 하였다. 무려 2개월간 죽은 시체를 싣고 다니며 시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유조를 조작하여 변방에 있는 부소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가짜 황명을 전했다. 그리고 부소가 자결 할 때까지 순행을 계속했다. 가짜 유조를 받은 부소와 몽염 장군은 유조를 의심했다. 하지만 황명이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몽염 장군은 부소에게 동쪽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부소는 결국 한반도의 남쪽 끝인 남해섬 금산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바위 속에 숨어 지냈다. 결국 호해는 황제에 오고 조고는 권력을 장악했다. 서불은 남해 금산에서 서불과차를 남..
두모해안에서 금산으로 향하는 냇가 논 가운데 두꺼비를 닮은 큰 바위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두꺼비바위, 물개바위, 갈매기바위 등으로 부른다. 바다가 그리운 짐승이 다급히 움직이는 모양, 날개를 세우고 날아오를 듯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에는 깊고 얕은 성혈이 무수히 패여 있다. 서복 선단이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뱃길의 안내자로 물개를 데려 왔다. 그 때 데려온 물개가 하루에 세 번씩 금산을 오르내렸다. 어는 날 서복 선단이 철수를 하자 금산에 올랐던 엄마 물개가 배에 타지 못하고 말았다. 서복 선단과 헤어진 물개는 아기 물개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울면서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친 엄마 물개는 울다 지쳐 온 몸이 굳어지면서 바위가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서복선단이 돌아와 아기 물개를 만나면 이 바위가 다시 물개로 변하여 서복선단과 함께 떠나면 마을이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꼬리를 잘라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진나라 장양왕은 21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5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하였고, 그는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전설적인 지배자의 신성한 칭호를 취해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선언했다. 6개국 통합 순행비를 세우기 위해 도교의 성지를 찾아가서 동해를 바라보니 그 때 신기루가 나타났다. 진시황은 신기루를 보고 신하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그 곳은 신선이 계시는 곳으로서 해중에 삼신산이 있어 이름하여 봉래, 방장, 영주라 하옵고, 신선이 계셔수 불로불사약을 관장한다 하옵니다." 진시황은 신선들과 같이 영생불사 하고픈 생각이 간절하였고, 현실과 맞지 않는 꿈 같은 일이라 생각을 뒤로한 채 궁으로 갔다. 진시황은 마음이 늘편치 않고 불안하고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았고, 죽은 후를 위하여 지하에 궁전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조회 석상에서 말했다. "짐이 오래 살아야 진나라가 태평하지 않겠느냐?" 송무기가 나서서 아뢰었다. "동해바다 저 편에 삼신산 신선이 계시온데 그 곳에 불로불사약이 있다 하오니 이를 구해 복용하시면 영생하실 것이옵니다." "짐도 삼신산 신선 이야기를 들은 바 있소. 그런데 경은 그 삼신산과 선인을 본 바 있는가?""신은 본 바 없사오나 방사 서복은 일찍이 동해 저편에 갔다가 신선들이 학을 타고 노는 것을..
옛날 옛적에 하늘나라의 신선이 기이한 바위들이 즐비한 남해 금산에 유람을 왔고, 금산 정상에 오른 신선은 사람의 두 길도 넘는 커다란 목혜 한 쌍을 남쪽으로 향하여 벗어 놓았다. 맨발로 금산의 신기한 바위들을 밟으며 절경에 취한 신선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해가 늬엇늬엇 기울자 하늘로 급하게 올라갔고, 너무나 아름다운 금산과 남해바다에 넋이 나간 신선은 정상에 나막신을 벗어놓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 나막신은 주인인 하늘나라 신선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세월이 지나면서 돌로 변했다고 하고, 불리는 나막신바위 아래 너럭바위는 마치 한반도의 형상으로 나막신바위를 받히고 있다. 개인적인 치성터로 보이는 목혜바위는 남쪽에서 보면 여근석으로 보인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봉 선생이 금산 탐승길에 '유흥문상금산'이라는 글자를 새기면서 문장암으로 불리고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보리암 앞에는 탑대가 있다. 금산을 오른 관광객이 반드시 들리는 이곳은 금산의 제1전망대로서의 명성도 가지고 있고, 멀리 미조해안의 섬들과 송정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탑대라는 이름은 김수로왕의 황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쌓았다는 보리암전 삼층석탑이 있어 붙여졌다. 남해 바다를 굽어보며 금산 상봉에 도도히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돌아오면서 풍량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무사히 돌아왔고 그 돌로 쌓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석탑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 북쪽을 북쪽이라 가리키지 않고 위치에 따라 나침반의 N극이 동서남북을 모두 돌아가며 가리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탑 근처에 대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기가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