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금산은 석가세존이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쌍홍문을 뚫고 노닐었고, 그리고 천정에도 구멍을 뚫었다. 쌍홍문 안에는 지름 30~40cm 정도의 구멍 세 개가 있고, 구전에 의하면 이 구멍 세 개에 돌을 던져 모두 들어가면 금산 산신령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한다. 금산의 절경을 노닐던 석가세존이 인도로 가기 위해 미조를 지나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섬의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 돛대 모양의 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바다 한가운데 불쑥 솟은 섬의 중앙에는 큰 동굴이 오른쪽에는 작은 동굴이 뚫려 있다. 이 섬은 석가세존이 지나가면서 동굴이 뚫렸다 하여 세존도로 이름 지어졌고, 기우제를 지내는 섬으로도 유명하다. 남해에는 옛날부터 비가 오지 않으면 세존도로 향한다. 살아있는 돼지와 일반 제물, 제관, 무속인을 태우고 먼 뱃길로 가야 하며, 풍악을 울리고, 뱃전을 두드리고, 파도를 일게 하고, 흑운을 일게 하며 세존도에 도착한다. 세존도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살아있는 돼지 피를 온 섬에 뿌리고 돼지 머리를 제상에 차리고 정성껏 제를 올린다. 제를 지낸 후에 계속하여 치성굿을 행한다. 이렇게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나면 3일 후에 반드시 이슬비라도 내렸다고 한다. 한 ..
금산을 오르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38경 중 하나가 사선대이다. 사선대는 네 명의 선녀 또는 비구니와 사명대사, 이순신 장군에 관한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황악산 직지사 유정이 보월과 사랑을 하여 세속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로 직지사에서 쫓겨났고, 선종판사 보우는 유정의 무죄를 가려서 전국 사찰에 통고하여 유정을 찾게 하였다. 한편 보월은 자신의 잘못으로 유정이 축출 당하자 유정의 스승이신 신묵화상에게 잘못을 빌고 비구니가 되어 일심으로 참회하였고, 어느 날 신묵화상의 부름을 받은 보월은 주지스님이 계신 곳으로 가보니 신월 비구니와 보운, 보련스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묵화상은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남쪽으로 가서 남해 금산 보리암으로 찾아가거라. 그곳에는 너희들을 잘 지도할 분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신월스님은 수고롭겠지만 저 애들을 데리고 금산 보리암을 찾으시오. 관세음보살님은 꼭 남해 금산에만 계신 것은 아니지만 저 애들은 그곳에 인연이 있으니 그렇게 아시고 곧 떠나시오." 신월스님은 하직 인사를 드리고 보운, 보련, 보월스님을 데리고 절문을 나섰고, 신월스님 일행은 거창, 안의, 함양, 산청, 하동을 거쳐 남해 금산 보리암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중턱을 지나니 계곡이 있..
남해 금산 보림암 동쪽 삼불암 아래에 조선 태조기단이 있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100일 동안 기도를 드린 끝에 산신령의 감응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전설과 이에 보은한다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광산에서 금산으로 개명하였다. 이성계는 금산 산신령을 향해 백일기도를 올렸고, 마지막 날 그는 난음 정자나무 아래에서 행신의 말을 듣고 온 젊은이의 말을 듣고 최선을 다해 상을 차리고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 마지막 날 기도를 올린 이성계는 꿈을 꾸었고, 개성으로 향하는 자신의 등 뒤에 말뚝 세 개가 짐 지워져 있었다. 그 말뚝을 지고 개성에 도착하자 자신이 목없는 물병으로 변하는 것이었고, 그 목 없는 물병이 가마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눈을 뜬 이성계는 두 개의 바위가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꿈이 마음에 걸렸다. 급하게 보광산을 내려온 이성계는 해몽가를 찾아 자신이 꾼 꿈이야기를 했고, 해몽가는 큰절을 올리고 말했다. "몸이 세로 기둥이 되고 세 개의 말뚝이 몸을 가로질렀으니 임금 왕자입니다. 그리고 목이 없는 물병은 한 손으로 따를 수 없으니 두 손으로 떠받드는 분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병이 가마솥 안으로 들어간 것은 장차 장군의 왕국이 철옹성처럼 굳건..
옛날 남해섬의 어떤 고을에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하인들 중 한 명의 아들인 돌쇠라는 총각이 주인의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한 신분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었고, 돌쇠는 마음만 태우다가 상사병이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죽고 말았다. 며칠 후 사랑을 이루지 못한 돌쇠의 혼이 구천을 떠돌다 구렁이로 변하여 밤에 주인의 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 감았고, 다음날 아침 구렁이가 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본 부자는 기겁을 했다. 구렁이를 딸의 몸에서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꼼작도 하지 않았고, 부잣집 내외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전전긍긍하고 있던 부잣집에 수염이 긴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따님과 구렁이를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으로 데려가서 굿을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해 보아라." 노인이 사라지자 부자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딸을 데리고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 위에 올라가 굿을 하기 시작하였고, 굿이 한창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뱀의 서서히 풀어지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
장전마을 앞 북서쪽에 있는 배를 엎어 놓은 모양의 작은 동산이 비자당산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비자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베어지고 몇 그루만 남아 있고, 옛날에 동산 꼭대기에 탕집잉 있었고 거기에 깊은 우물이 있었으나 근년에 와서 메워져 없어졌다. 아주 먼 옛날 임금님의 아들이 이곳에 와서 살았고, 이 왕자는 옛날 포상팔국중 한 나라의 왕자였거나 신라 왕자였다. 왕을 대신하여 이 곳을 방문하였다가 살기가 너무 좋고 아름다워 눌러앉아 집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왕자를 위하여 당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고, 왕자가 죽어 용왕이 되었거나 바다를 지키는 해신이 되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40년 전만 해도 당상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는 각종 선박이 이곳에 기착하여 용신제를 지내야만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까지도 당밑 마을에 무속인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조선조 허목의 [미수기언] 제63권 습유편에 나오는 비자당산과 신라왕자의 이야기를 담은 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용을 타고서 비취 날개 펼치고 거센 파도 능멸히 보며 의기가 양양하다 의기가 양양하니 그 기상 호탕하구나 끝없는 시야 밖엔 구름만이 침침하다 우수수 낙엽 지니 그 풍경 쓸쓸한데 바다에..